저에게는 먼 친척 형이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K시로 왔으나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어서 한달에 쌀 네말만 주고 친척 형은 우리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친척 형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작은 아버지(농사 짓는) 도움으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저희 집은 K시 변두리에 있는 축산시험장 일본인 관사에서 살았는데 여러가지로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그당시는(1950~60년대) 버스가 동네 가까히 오지 않아서 4킬로정도를 걸어가야 버스를 탈 수 있어
어머님은 이른 새벽5시에 일어나서 저를 업고 풀무질해가며 연기가 매워서 눈물흘리며 나무불을 때서
새벽밥을 해서 먹이고, 돼지키우고, 닭키우고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던 때였습니다.
친척 형은 어려운 환경탓인지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다 코피를 흘리고
쓰러질 때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님은 좋은 반찬, 좋은 음식을 해서 먹이고 지극 정성을 다하고 자기 자식처럼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덕분인지 삼류고등학교 개교 사상 처음으로 K대 의대를 합격하였습니다. 이렇게 저희집에서 6년간을 지내고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가서, 소아과 전문의로 성공을 하였지만 그뒤로 지금까지 친척 형은 저희집에 다시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시골인 구례에 친척 형의 어머님, 여동생이 있어서 여러번을 왔으리라 생각이 들지만 친척 형은 연락하지도, 저희집에 찾아 오지도 않아서 아직까지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몇년전에 저의 가게 바로옆에 과일 파는데가 있었고,그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습니다. 아이스크림 냉장고 앞에는 항상 아이들이 몇명씩 모여 있었습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어린 남매가 아이스크림 냉장고 앞에 서서 먹고싶은지 빤히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주었습니다.
작은 아파트단지여서 인지 맞벌이 하는 부모들이 많았습니다. 새로운 사업을 한지 얼마 안된 때 였는데, 그 아이의 부모는 부천으로 이사를 가서도
필요한 제품을 구입할 때는 반드시 여기까지 물건을 사러 찾아 왔습니다.
낮아보이는 사람에게 작은 친절은 고마움으로 다가오고
높아보이는 사람에게 작은 배려는 무관심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낄때가 많았습니다. |